본문 바로가기
심리학 & 사회복지 & 놀이치료

놀이치료의 의미: '놀이치료'란?(What is play therapy?)

by 만두용 2023. 3. 21.

놀이치료란?

 

아동의 놀이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많은 의미로 가득 차 있고 중요하다.
* 프뢰벨(Fröbel)


우리는 발달적 관점에서 아동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며, 아동을 축소된 어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아동의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 있으며, 그 현실에서의 경험은 종종 놀이를 통해 전달된다.

 

아동이 자신의 정서 세계를 탐색하고 표현하도록 북돋으려는 심리학자는 아동이 그들의 현실과 언어적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개념적-표현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른은 언어라는 매개체로 의사소통하지만 아동은 놀이와 활동으로 의사소통한다.


<놀이의 기능>

아동의 자연스러운 발달과 전체성을 위한 놀이의 중요성은 일반적이고 빼앗을 수 없는 아동의 권리로 각국의 놀이 선포에서 강조되어 왔다. 놀이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아동기의 유일한 중요 활동이다.

아동은 놀이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고, 또한 아동을 강제로 놀게 할 필요도 없다.

놀이는 자발적이고, 즐거워야 하며, 목표가 없어야 한다.

 

아동의 놀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몇몇 성인은 놀이의 의미를 하나의 과제로 정의하였다.

아동의 성장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많은 성인은 '아동이 놀이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성인이 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목표를 위해 아동이 일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저자는 놀이를 아동의 작업으로 정의한다. 이는 놀이가 다소 경험적이고, 친숙하게 하려는 노력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인들의 세계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어느 정도 들어맞을 때에만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다.

아동기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단순히 성인기를 준비하는 시기가 아닌 것처럼, 놀이는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지향 하는가와는 무관하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과제를 수행하고 목표나 성과지향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놀이는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외부 보상적이지 않으며, 숟가락을 자동차로 사용하는 아동의 경우처럼 그들의 세계를 개별적인 개념에 맞추도록 동화한다.

프랭크(Frank, 1982)는 아동들이
어느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배우는 방법이 놀이라고 하였다. 
아동들은 사물, 동물, 구조물, 사람들을 공간과 시간의 실제 세계에 기초를 두고 탐색한다. 
아동들은 놀이 과정에 몰두함으로써 우리의 상징적인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됨과 동시에 자신만의 개별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탐색하고, 실험하며, 배우게 된다.

울트만(Woltmann, 1964)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아동의 활동은 그들 자신을 개념화하고, 구조화하며,
그룹의 경험과 감정을 실제 활동 수준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놀이는 아동을 방해하고, 갈등에 쌓이게 하며,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에서 '행동으로 표현'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어린 아동들은 지각 발달 과정상 특히 어휘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놀이도구의 다양한 형태는
아동의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상적인 역할을 한다(p. 174).

대부분 열 살이나 열한 살 미만의 아동은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있기가 어렵다.

이 어린 아동들은 계속 앉아 있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비생산적인 활동에 창조적인 에너지를 써 버린다.

놀이치료는 아동의 욕구가 신체적인 활동이 되도록 한다. 놀이를 통해 아동들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자생적인 일을 준비하며, 힘든 목표를 달성하고, 좌절을 반복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신체적인 접촉을 하고, 경쟁의 욕구를 배출하며,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방법으로 공격적 행동을 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놀이는 아동들이 그들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조절하고 문화와 기술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Papalia & Olds, 1986). 아동들은 놀이를 통해 그들의 성격을 표현하며, 자신의 내적 자원이 성격과 결합되도록 한다.


<놀이를 통한 아동의 의사소통>

 아동의 놀이는 그것을 그들의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의 매개체로 여길 때 더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아동은 놀이를 할 때 더 편안할 수 있으므로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자신이 창조한 자발적인 놀이를 통해서 보다 더 직접적이고 충분하게 자신을 표현한다. 아동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놀이로 표현하는 것' 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자기 치유적인 과정이다. 놀이는 의사소통의 매개체이므로 아동에게 언어로 표현하라고 제한하는 것은 사실상 “너는 대화 수준이 나만큼은 되어야 하고, 언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해." 라고 강요하여 자동적으로 아동과의 치료관계에 장벽을 만든다. 치료자는 아동의 수준에서 그들이 편안해할 수 있는 매개체를 가지고 아동과 의사소통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왜 아동이 성인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치료자는 잘 적응할 수 있고, 또한 대처기술과 아동발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모든 단계에서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치료자가 "이것에 관해 내게 이야기해 줘." 라고 말하였을 때, 어린 아동들은 치료자를 받아들어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아동과의 치료관계는 놀이를 통해서 가장 잘 이루어지는데, 이 관계는 우리가 치료라고 말한 활동에서 중요하다.

놀이는 갈등을 해결하고 감정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놀잇감이 아동의 표현 매개체이기 때문에 놀잇감은 표현 과정을 수행하게 한다. 아동의 자유로운 놀이는 하고자 하는 것의 표현이다.

아동은 지시받지 않고 자유롭게 놀 때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표현한다. 아동은 감정과 태도를 개방하도록 강요받아 힘들었던 점을 풀어 놓게 된다." (Axline, 1969,p. 23) 아동이 직접적으로 표현하도록 위협적으로 강요받은 감정과 태도는

자신이 선택한 놀잇감을 통해서 표출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대신에 아동은 모래에 파묻고, 용에게 총을 쏘며, 동생을 의미하는 인형을 때릴 수 있다.

 

 아동의 감정은 중종 언어 수준에서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발달상 자신의 느낌을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인지능력이 부족하다. 정서적으로도 자신의 감정 강도를 대화로 적절하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피아제(Piaget, 1962)의 연구에서 보면, 아동은 대략 열한 살까지는 추상적인 논리나 사고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는다. 단어는 상징을 만들고, 상징은 추상적이다. 따라서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추상적 본질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동의 세계는 구체적인 세계이므로 아동과의 접촉이 있는 것처럼 접근해야 한다. 놀이는 아동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아동의 방식대로 그들의 세계에 대치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아동은 현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른의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경험은 미래 지향적이고 추상적이다.

아동이 놀이를 통해 이러한 미래 지향적이고 추상적인 경험을 재연할 때 그러한 경험은 지금 여기(here and mom)에서 자신의 말로 추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 아동이 그들의 경험을 표출할 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익숙한 것이 된다.

 

 대부분의 정상적이고 유능한 아동도 살아가면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아동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대로 놀이를 함으로써 단계적인 과정에서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종종 아동은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즉,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둔 자원의 내적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놀이에서 순간적으로 잠깐 느끼고 지나갈 수 있기도 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끝을 맺을지도 모른다. 직접적인 위험이 없을 때에는 간섭하지 않고 아동의 놀이를 승인하는 것이 최선의 상책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동이 놀이에 열중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은 아동이 탐색하는 것을 배우고 발견하게 하는 것으로, 결국 그가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Bettelheim, 1987, p. 40).

 

댓글